회봉 하겸진은 병석에 누워 제자들을 불러 평생 이루지 못한 세가지를 말했다. “일생동안 주공 공자 자사 맹자 정자 주자를 숭모하였는데에도 그들의 유적을 살피지 못한 것이 한가지 한(恨)이요, 분분한 선배들의 성리설(性理說)을 통일하여 불멸의 진전(眞詮)을 후세게 명시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두가지 한이요, 이 나라가 왜로의 학정에 시달린지 30여년이 넘었건만 죽기 전에 서광을 보지 못하고 죽으려 하니 이것이 세가지 한이다”고 하였다. 당시 회봉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을 가지고 제자들에게 3가지 한스러운 것을 말하고, 제자들이 자신의 뜻을 이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같이 말한 것이었다.

　회봉에게 있어 이 세가지 한(恨)이 곧 삶의 지향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니, 이는 곧 ‘도학의 부흥’과 ‘나라의 광복’이었다.

　당시 선비들 중에는 평생 ‘도학의 부흥’과 ‘나라의 광복’을 염원한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를 몸소 실천한 선비가 있었는가 하면, 실천보다는 생각에 그친 선비들도 많았다. 회봉은 이를 몸소 실천한 선비이다. 회봉의 실천은 곧 남명의 실천정신에 그 맥이 닿아있다.

　회봉은 한평생 남명 선생을 숭모했다. 회봉의 선조인 각재 하항, 송정 하수일 등이 덕천연원(德川淵源)인 이유도 있겠지만 그보다도 남명의 실천교육(實踐敎育)을 배우고 따르고자 해서이다.

　회봉은 면우 곽종석의 문하에서 수업을 하면서 남명의 실천정신을 더욱 가슴깊이 새기게 되었다. 면우 또한 남명의 학문을 계승한 학자였다. 당시 면우의 문인들 중 광복의 대열에 참여하지 않은 자가 드물었는데, 회봉은 수제자로서 남들보다 앞장서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 일부 유학자들은 도학과 광복 운동을 구분하여 이르기를 “구도(求道)에 뜻을 둔 선비가 어찌 세상 일에 관여하겠는가. 도는 도요, 국사(國事)는 국사다. 도는 학자가 닦고 국사는 지사가 담당해야 한다” 하고 완고하게 집거하면서 광복운동에 나서지 않았다.

　이러한 생각에 대해 회봉의 스승 면우는 “그 이르는 바 도는 무엇이며 그 도를 구하여 어디에 쓴단 말인가. 나라가 태평할 때 유자가 구도에 매진하여 정사(政事)의 득실에 초연함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으나 그러나 종사를 잃고 그 광복을 꾀하는 이 판국에 임하여 광복운동은 나와는 무관하다고 한다면 그 도를 닦아 어디에 쓴단 말인가. 그것은 유자의 본분이 아니다. 구국을 외면하고 창생을 포기하는 도는 공자의 도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나라가 있고 나서 도학이 있게 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회봉 역시 스승 면우의 이러한 입장에 전폭적인 지지를 하며 따랐던 것이다.
　이는 회봉이 제1차, 제2차의 유림단 사건(儒林團事件)에 참여하여 조국의 광복 운동에 심력을 바쳤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비록 총검으로 적을 타도하지는 못했으나 그러나 선비로서 취할 수 있는 거사에는 용감하게 실천하였다.

　회봉은 ‘국성론((國性論)’ 3편을 지어 당시 국민들에게 민족 고유의 정신을 고취시키고자 했다. 물밀듯이 들어오는 서양문물의 피해를 자각하고 우리 민족 고유의 정신을 살려야 한다는 취지의 글은 바로 그의 우국충정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의(禮儀)는 우리의 고유(固有)한 국성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르기를 오늘날에 선진의 기술(技術) 세리(勢利) 무력(武力)을 습득하지 않고 헛되이 예의만 고수하면 장차 저들을 대적(對敵)하겠는가. 어찌 간우(干羽)의 무(舞)로 평성(平城)의 포위(包圍)를 풀게 할 수 있겠는가 하고 반문한다. 나도 또한 필적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필적할 수 없을수록 더욱 예의를 닦아야 한다. 저네들이 기술과 세리와 병기(兵器)로 장점을 삼으면 우리는 고유의 예의로 장점을 삼아야 한다. 인간이 무능하면 참 인간이 못되는 것과 같이 국가도 특별한 장점이 없으면 참 국가가 될 수 없다.”면서 국성론 말미에 “어찌 자기 나라 사람을 스승삼지 아니하고 많은 비용으로 외국인을 초빙하여 스승 삼으며, 또 고생을 겪으면서 일본 중국 영국 프랑스 미국 등지로 유학하는가. 공자를 배우면 노예가 되고 선진 제국을 배우면 노예가 안된단 말인가. 그 노예란 무슨 소리인가. 내가 믿는 것은 도이다. 도가 존재하는 곳에 스승도 존재하는 것이니, 하필 우리나라 사람만을 고집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중국뿐만 아니라 일본이나 서양에서 공자 같은 성인이 나온다면 나는 흔쾌히 좇아 사사(師事)할 용의가 있다.”고 했다. 국성론의 일부분으로 우리들이 읽어도 교훈이 되만한 글이다. 서양문물만 추구하면서 우리의 전통인 예의를 헌신짝 버리듯이 하는 요즘, 약 100년전 회봉의 주장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다시한번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img2]　회봉은 당시 분분하던 성리설(性理說)을 통일하여 불멸의 진전(眞詮)을 후세에게 명시하지 못한 것이 두번째 한으로 여길 만큼 성리학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회봉의 성리설은 그가 지은 심위자모설(心爲字母說)에 잘 드러나 있다. ‘심위자모설’은 동양철학의 오묘한 심성론을(心性論)을 대성(大成)하고 당시 일부 학자들의 허망한 공리공담을 조리 있게 비판한 글이다.

　회봉은 뛰어난 문장력을 지닌 선비였다. 당대 강좌의 심재 조긍섭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문명이 전국적으로 퍼져 있었다. 그의 문집에는 나라 잃은 시대를 살아간 선비의 바람을 을지문덕(乙支文德) 강감찬(姜邯贊) 이순신(李舜臣) 및 남이(南怡) 김덕령(金德齡) 등 명장의 전기(傳記)를 지어 드러내고자 했다.

　회봉은 만년에 동시화(東詩話)를 지어 우리나라 시화를 집대성했다. 신라시대의 향가(鄕歌)에서 한말(韓末)의 명시(名詩)에 이르기까지 연대별로 배열하였고 작가는 충신 열녀로부터 협객 여류 작가에 이르기 까지 광범위하게 채록해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예전에도 파한집(破閑集) 보한집(補閑集) 등 시화가 있었고, 서거정이 편찬한 동인시화(東人詩話)가 있기는 하나 그러나 그 내용의 완벽함은 동시화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위당 정인보(鄭寅普)는 ‘동시화’ 서문에서 우리나라에서 일찍이 볼 수 없는 진기(珍奇)한 시화라고 극찬을 하기도 했다.

　회봉의 문장에 관하여는 학자에 따라 일치하지 않으나 한결같이 높게 평가한 점에는 이론이 없다. 어떤 사람들은 회봉의 문장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고문(古文)이라 칭찬했고 혹은 여한십가문( 麗韓十家文)에 견줄만하다고 했다.

　한말의 대표적 문장가인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은 김농암(金農巖)과 장계곡(張谿谷)의 문에 필적(匹敵)한다고 하였다 하니 그 진가를 짐작할 수 있다.

　회봉 하겸진은 지금도 강우지역에선 도학과 문장으로 이름난 선비로 알려져 있다. 또한 나라잃은 시대를 살아가면서 광복을 염원하며 이를 실천한 독립 유공자로서도 잘 알려져 있다.